영국 생활이 끝나가면서 나는 아쉬운 마음에 주말마다 교외로 나갔다. 본머스는 영국 땅 남쪽 끝에 붙어있는 곳이었지만 교통편이 나쁘지 않은 편이다. 큰 도시에 바로 닿을 수 있는 기차가 있고 가까운 곳에 공항도 있어서 다른 나라에 갈 때도 좋았다. 단, 지도 상 가로로 이동할 때에는 꼭 기차를 한두 번 갈아타야 하는 어려움이 있었다. 아룬델 캐슬은 그런 곳 중의 하나였다.
중세 유럽의 봉건제도 때문인지 영국 안에 이런 성이 많이 있다. 보통은 현재 왕족 명칭의 유래가 된 윈저 캐슬을 많이 찾는데 나는 지도에서 아룬델 캐슬을 발견하고 무슨 이유에서인지 여기에 꽂혔다. 아룬델 캐슬은 아룬델이라는 작은 마을에 있다. 이름도 왠지 동화 속에 나오는 마을 같은 이 곳은 작지만 구석구석 볼거리가 많았다. 카페와 펍, 빈티지 샵을 지나자 멀리 보이던 아룬델 캐슬이 가까워졌다.
티켓의 종류에 따라 입장할 수 있는 공간에 차이가 있었는데 이왕 온 김에 다 보기로. 안으로 들어가자 금세 다른 세상처럼 고요해졌다. 길 옆으로 잘 정돈된 정원이 돋보이고 그 끝에 다다르자 웅장한 캐슬이 모습을 드러냈다. 캐슬 안에는 세기 힘들 정도로 많은 방이 있고 가구와 식기, 액자, 작게는 탁상시계까지 모두 보존되어 있어서 보는 즐거움이 있다. 그 밖에는 이 곳 주인인 노퍽 공작(Duke of Norfolk) 가문에 대한 전시.
역사가 느껴지는 이 캐슬 자체도 멋지지만 주변에 조성된 정원도 정말 볼 만하다. 실제로 이 안에서 가족들과 함께 피크닉을 즐기거나 벤치에 앉아 이야기를 나누고 책을 읽는 사람들을 많이 보았다. 혼자 온 나도 잠시지만 잔디밭에 앉아 과일을 먹고 멍하게 시간을 보냈다. 여기서 보는 경치의 하이라이트는 무엇보다 요새에서 내려다보는 아룬델 전경이다. 이 주변에서 가장 높은 지대에 캐슬이 있는 데다가 가파르게 이어진 계단까지 오르면 마치 세상 끝까지 보이는 것 같은 착각이 들었다.
런던의 화려함도 멋지지만 오래도록 기억에 남는 건 이렇게 푸른 날에 잔디밭에 앉아서 즐겼던 여유로운 시간들인 것 같다. 이곳에서의 기억 때문인지 나에게 영국이 가지는 의미도 이날 여기서 본 풍경과 비슷하다.
'★' 카테고리의 다른 글
에딘버러, 스코틀랜드 (Edinburgh, Scotland) (0) | 2020.05.06 |
---|---|
부다페스트, 헝가리 (Budapest, Hungary) (0) | 2020.05.04 |
더들도어, 영국 (Durdle Door, England) (0) | 2020.05.01 |
더블린, 아일랜드 (Dublin, Ireland) (0) | 2020.04.30 |
옥스퍼드, 영국 (Oxford, England) (2) | 2020.04.29 |
댓글